혼돈 속 홍콩, 화재의 연기 너머 흐릿해진 민심의 풍경
지난 겨울의 문턱, 2021년 12월 19일 일요일은 홍콩에 잊을 수 없는 날로 기록될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침사추이 한복판의 상가 건물에서 뿜어져 나온 시커먼 연기는 홍콩 시민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듯했습니다.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그 연기 속에서 화마는 스물일곱 명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가고 수많은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 참혹한 비극은 홍콩을 슬픔에 잠기게 했지만, 이날은 또 다른 의미로 홍콩의 미래를 가늠하는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바로 홍콩의 입법회(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진행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화재 참사가 드리운 그림자, 유난히 싸늘했던 선거 풍경
2021년 홍콩 입법회 선거는 '애국자가 홍콩을 통치한다'는 중국 정부의 새로운 기조 아래 진행된 첫 번째 선거였습니다. 선거 방식이 대폭 개편되어 후보 자격 심사가 엄격해졌고, 민주파 진영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불출마하거나 출마할 수 없게 되면서 사실상 친중파 후보들만이 경쟁하는 구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진행된 선거는 시민들의 관심을 끌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우려를 넘어 '충격적'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저조한 투표율을 기록했습니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번 선거의 최종 투표율은 30.2%였습니다. 이는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최저 투표율이었으며, 직전인 2016년 입법회 선거의 투표율 58.3%에 비하면 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수치입니다. 참혹한 화재 참사가 발생한 바로 그 날, 민심은 차갑게 얼어붙은 듯 보였습니다. 거리의 전광판에는 비극적인 화재 소식과 함께 저조한 투표율 속보가 번갈아 나타나며 홍콩의 복잡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세 가지 키워드로 읽는 저조한 투표율의 민심
이번 투표율 저조는 단순히 숫자를 넘어 홍콩 사회의 깊은 고뇌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관점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변화된 선거 제도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복잡한 심경
중국 정부는 '홍콩판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선거 제도를 개편하며, 모든 후보는 '애국심'을 검증받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민주파 진영이 사실상 배제되면서, 많은 홍콩 시민들은 선택권이 제한된 선거에 대한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홍콩대 정치학과 장모 교수는 "시민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선거의 본질적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시민들이 "투표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2.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또 다른 형태? '백지투표' 혹은 '투표 거부'
과거 홍콩에서는 민주주의와 자율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했습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물리적 시위는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이번 선거에서는 '백지투표'나 '투표 거부'를 통한 소극적 저항 움직임도 감지되었습니다. 비록 홍콩 정부는 투표율이 낮더라도 '애국자 통치' 원칙이 확고하다는 입장이었지만, 낮은 투표율 그 자체가 기존 질서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침묵의 시위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3. 일상과 생계의 고단함, 정치적 무관심으로의 전환
코로나19 팬데믹과 경기 침체는 홍콩 시민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치솟는 물가와 불안정한 고용 시장 속에서 많은 시민들은 당장의 생계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화재 참사와 같은 비극은 이러한 일상적 고단함을 더욱 부각시키며, 정치적 참여보다는 삶의 현실적 문제 해결에 우선순위를 두게 만들었습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결과가 뻔한 선거에 굳이 시간을 낼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한 시민의 푸념은 이러한 현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현장의 목소리: "우리는 그저 평범한 삶을 원할 뿐입니다"
선거 당일, 투표소 근처에서 만난 50대 홍콩 시민 리밍 씨(가명)는 "예전에는 투표가 우리 목소리를 내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정해진 것만 같습니다. 투표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요."라며 허탈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요즘 홍콩은 너무나 복잡하고 힘듭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반면, 투표를 마친 30대 회사원 찬와이 씨(가명)는 "어렵게 얻은 선거권인데,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선택의 폭은 좁아졌지만, 그 안에서 최선을 선택해야죠."라며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소신을 밝혔습니다. 두 사람의 엇갈린 목소리 속에서 홍콩 시민들의 깊은 고뇌와 희망이 뒤섞여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화재의 연기처럼 짙어진 불확실성, 그러나 희망은 어디에
홍콩 입법회 선거의 충격적인 투표율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넘어 홍콩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이는 시민들의 정치적 무력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는 이번 선거 결과를 '홍콩 안정을 위한 성공적인 개혁'으로 평가할 것으로 보이지만, 시민들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쉽게 걷히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왔습니다. 저조한 투표율이 현재의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면, 언젠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홍콩 시민들의 목소리가 모일 수도 있습니다. 화재의 연기가 걷히고 나면, 그을음 속에서도 새로운 싹이 돋아나듯, 홍콩 시민들의 삶과 희망은 어떤 형태로든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작은 섬 도시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그리고 그 안에서 개개인의 소중한 삶들이 어떤 의미를 찾아갈지 계속해서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홍콩에 사는 이들의 일상과 내일을 응원하며, 인간적인 따뜻함이 결코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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